(파묵칼레/에페소/이즈미르)
아직도 시차 적응이 안되었는지 새벽에 일찍 일어나..
자다깨다 .. 보니 눈/비가 내리고 있다.
그리 먹을게 풍부하지 않은 호텔 아침식 후 에페소가 있는 셀쭉으로 향한다.
우리 단체 여행팀은 모두 18명인데 대부분 학교 여 선생님들로
남자는 술 안마시는 20대 청년과 나 둘 뿐이다.
버스에 올라 혼자 술을 한잔 걸치고(라크..원액을 마셔도 맛이 없다...)
맨 뒷자석에서 눞는다. 에페소까지 한숨 자면서 갈 요량인데..
가이드가 옆 지붕위 병을 보세요..해서 벌떡 일어나 사진기를 찾으며 설명을 듵는데
사진찍기는 물 건너갔다.
지붕위 굴뚝에 빈병이 꺼꾸로 밖힌 집이 간간히 보이는데
병이 콜라병처럼 적으면 어린 처자가..
병이 우유병처럼 크면 혼기가 꽉찬 처자가 있다는 표시라 한다.
그집 처자가 맘에 있는 청년은 가축을 끌고가서 허락을 밭고
돌팔매 질로 병을 깨트려야 한다고..
(혼담이 오가고 부모들 상견례가 여자집에서 이루어진 다음
여자측서 맘에 들면 맛있는 커피를,그렇지 않으면 커피에다 소금을 타서 내와
우회적의로 의사표현을 한다고 한다.)
(지붕위 병 사진찍기 실패!)
아무튼 다시 한숨자고 일어나니 가죽옷 쇼핑장이다.
유럽이나 남미와는 달리 터키에서는 어린 양의 도축이 금지되지 않아
실크 스킨을 쉽게 구할 수있으며 따라서 품질이 좋다고 가이드가 알려준다.
(어린 양 가죽을 실크 스킨이라 하고 어른양 가죽은 무스탕이라한다나?)
오늘 점심도 피르 졸라라하는 어린 양 갈비를 먹는다고 알려주며
이집트의 파피루스와 양피지, 페르가몬 제국등에 대하여 부연 설명을 한다.
페르가몬 왕국은 아나톨리아 반도의 북서부 에게해 지역에 있던 왕국으로
에우메네스 1세( BC 263~ 214)의 시대에 셀레우코스 왕국에서 독립하여
아탈로스 1세( BC 214~197) 시대에는 왕국이 되었고
에우메네스 2세( BC 197~159) 때 최성기를 맞이하여
로마 제국과 협력하여 시리아를 공격하는 등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중심지가 되었다.
최후의 왕 아탈로스 3세(BC 138~133)의 유언에 의해서 로마의 속주가 되었는데,
페르가몬의 문화가 발전하는 것을 시기한 이집트가 파피루스 수출을 금지하자
양피지를 발명했다고 한다.(영어의 양피지parchment는 페르가몬에서 생겨난 것임.)
파피루스에서 양피지로 바뀌면서 기록의 목차가 생기기 시작하여
그후론 양피지가 파피루스보다 기록을 남기는데 더 우월하였다.
(가죽 옷 쇼핑장소)
(오래된 차들이 전시되어 있고)
(그 사이로 공작들이 돌아다니는데..)
(인테리어를 우아하게 꾸며 놨다.남자 화장실 입구.)
매장 들어가기 전 패션쇼를 잠시 하는데 벽에 2012년 용이란 한자가 보인다.
가이드에 의하면 최근 중국 여행객이 급증했고 최상위권 경제력의 사람들이라 씀씀이가 큰데
그에 비하여 일본 사람들은 경제력이 중하위인 사람들이가 주로 와 그렇지 않다고...
그럼 우리나라는? 물어 보니 대답이 없다.
(매장안에는 즉석으로 옷을 고쳐주는 장인들이 대기한다.)
쇼핑후에는 꼬불꼬불 산속으로 올라가
숙박시설이 있는 식당으로 간다.
(여기에도 공작과 오리가 돌아다니고)
(음식점 주변엔 맨 올리브 나무다. 올리브유)
(식당 뒤에는 숙박시설이 있다.)
(드디어 나온 피르졸라)
피르졸라란 양갈비 구이란 뜻인데 어린양의 갈비가 냄새가 안난다고 한다.
포도주 한잔이 같이 나오는데 색갈은 이쁘지만 맛이 없어 다들 남겼다.
같이 나오는 빨간 소스는 에르메라 하는데 우리 입 맛에 잘 맞는듯..
(산에는 올리브 나무들..)
다시 꼬불꼬불 산길을 따라 시린제 마을로 간다.
(시린제 마을 광장과 마을버스)
시린제 마을은 그리스 사람들이 살던 산악 마을로 약 1,500년의 역사를 가진 곳이다.
(터키어로 쉬린은 아름답다는 뜻)
터키가 1차 세계대전에서 줄을 잘못서 패전국이 된 다음(세르브 조약 체결)
그리스가 안탈랴. 이즈미르등을 침략했는데 아타튀르크가 이들을 물리치고 전세를 역전시키면서
1923년 7월 불리했던 세르브 조약을 폐기하고 새로운 로잔 조약 조약을 연합국과 체결하였다.
당시에 그리스의 입장을 대변한 연합국은 이스탄불과 에게해의 여러섬들 중 택일을 권하였는데,
서구와의 연결을 중요시 여긴 아타튀르크는
에게해 모든 섬을 포기하는 대신 이스탄불과 보스포러스 인근 구역을 택하고
터키인이 전체 인구의 70% 이상인 지역을 터키 공화국의 영토로 삼았다.
그결과 터키 해안 가까이 있는 에게해의 여러 섬은 그리스 차지가 되었고
인구 강제 소환이 이루어져 130만명의 그리스인들이 터키를 떠났고
40만명의 터키인들이 그리스에서 터키로 돌아왔다.
(하얀 벽에 빨간 지붕의 옛 가옥이 특징이다.)
시린제 마을은 로잔 조약에 의하여 그리스 사람들이 떠나고
그리스에서 온 터키인들이 정착한 마을로(그중에는 유명한 선박왕 오나시스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수공예품과 올리브 비누, 와인 등이 유명한 곳이다.
골목에 쭉 늘어선 와인 가게 마다 무료 시음 코너가 있다.
마을 입구부터 골목 끝까지 올라가면서 시음을 했더니 나중엔 알딸딸해 진다.
(제일 많이 시음한 가게,정작 와인은 ...)
(가게 앞 나자르 본주)
정작 와인은 마을 끝 어떤 가게 가서 샀는데
같이 간 일행들이 주인 아저씨와 사진을 찍는다.
물어보니 인터넷에 소개 되었던 곳으로
가게안에 한국가수 윤계상 사진이 걸려있다.
(그래서 집사람도 기념 촬영..)
오전 내내 이동하고 먹고 쇼핑하하였는데 드디어 에페소로 간다.
< 에페소는 셀축 남쪽 피온 산 기슭에 자리잡은 터키 최대의 로마 유적지로
현제까지 28%만 발굴이 되었한다.
에페소(에페소스)는 BC 6000년 경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으며
아나톨리아 반도 중앙의 히타이트와는 적대 관계였던
아르지와의 왕국의 도시 아파사스(에페소스)에서 시작되었다.
아파사스는 '대지 여신의 도시'란 뜻이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에게해의 중심도시로
기원전 11세기 경 이오니아인들이 이곳을 점령했으며,
BC 5세기에는 스파르타, 그후 이후 페르시아의 속국이 되었다가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정복된 다음 ,그 부하장수인 리시마쿠스에게 넘겨졌다.
기원전 129년 페르가몬의 아탈로스 3세가 죽고 로마제국에 귀속되었는데
아우구스투스 황제때가 전성기로 인구가 25만 명이었다고 한다.
7세기 무렵 강에서 유입되는 토사가 바다를 메우면서
항구도시의 기능을 잃고 습지라 말라리아가 창궐, 기독교가 확산되면서
도시는 아야술룩 근처로 언덕쪽으로 옮겨 갔고 기존의 건물들은 파괴.방치되었다.
남문으로 들어가서 바다였던 평야쪽 북문으로 내려가며
유적지 답사를 하였다.
남문을 들어가면 삼성의 한글 안내판이 나와
한국의 유적지에라도 온듯한 착각이 잠시 든다.
안내판에는 '처음엔 아야술룩 언덕에 근처에 도시가 형성되었고
알렉산더의 장군 리시마쿠스에 의해 현위치로 옮겨 진 다음
비잔틴 시대에 아야술룩 언덕으로 다시 옮겨 졌다'고 쓰여 있다.
안내판을 지나가면 폐허의 돌덩어리들 속에서 잠시 멍청해지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면 왼쪽에 바리우스 욕탕이 나온다(AD 2).
(바리우스 욕탕)
바리우스 욕탕에는 커다란 세개의 아치가 있는데. 열탕,온탕,냉탕의 입구였을 것이다.
로마의 목욕탕은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남녀 혼욕을 금지하기 전까지 모두 혼탕이었으며
혼욕이 금지된 이후에는 목욕탕의 입장시간을 남여 따로 나누었다고 한다.
욕탕을 지나면 수도관 유적이 쌓여 있는 공터가 나오는데 여기가 스테이트 아고라이다
시장 기능을 하는 아고라가 아니라 정치적 회의나 종교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스테이트 아고라와 수도관)
아고라 옆에는 기둥이 늘어선 바실리카가 있는데
여기는 사채업자와 은행가들이 환전을 하던 곳이다.
그 우측에는 오데온이란 소극장이 있다(AD 2).
(오데온)
들어가보니 그래도 원형이 제법 보존되어 있는데 수용인원은 1,400명을 정도,
귀족 베디우스 안토니우스가 2세기에 세웠다고 하는데
음악회나 시 낭송회 또는 정치적 모임이 열렸다고 한다.
(오데온 상단에서 내려다본 모습, 앞으로는 바실리카와 스테이트 아고라가 보인다.)
참석자들은 모두 귀족이였는데 그 근거로 의자의 장식을 보면
황제와 권위를 상징하는 사자와 독수리의 발이다.
또한 지붕이 있었던 실내라고 추정되는데 바닥이 돌이 아니라 흙이기 때문이라고.
오데온 북쪽 상단으로 올라가면 에페소 전체가 내려다 보인다.
(에페소,우측 끝이 바다였던 자리임.)(누르면 확대됨)
(오데온 좌우에는 아치형 통로가 있고)
(들아가면 일층으로 이어진다.)
(출구)
오데온을 나오면 시 청사(town hall)가 나오는데 기둥만 일부 남아 있다(AD3 복구 AD4 말 파괴).
(시청사 자리)
1956년 두 개의 아르테미스 여신상이 이곳에서 발굴되어 에페스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었는데
시청 건물은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봉헌되었으며,
시청의 중요한 기능중 하나는 에페스를 지키는 성화를 보관하는 것이었다 한다.
(아르테미스 여신상)
아르테미스 여신의 가슴에는 풍요의 상징인 유방이 스물 일곱개 있다고 알려져왔으나
최근 유방이 아니라 황소의 고환이라는 설이 제기 되었다.
기둥의 단면을 보면 두개의 요철 구멍을 파고 거기에 홈을 내어
연결시 공기가 빠져 나오게 만들었다. 지진에 대비한 것이라고.
(시청사에서 북쪽을 내려다 보면 옛날에는 바다였을 평지와 늪지가 보인다.)
(다시 길을 따라 내려가면)
병원 건물이 나오는데 앞 사각 기둥에는
의학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와 그 로고가 조각되어 있다.
길 건너 맞은 편의 유적에는 약국표시가 새겨져 있는데
당시에도 의약분업이 이루어졌을까?
조금 더 내려가면 삼거리에 승리의 여신 니케의 부조물이 나온다.
날개 달린 니케가 왼손에 승리의 상징인 월계관을, 오른손에 보리이삭을 들고 있는데
전 세계에서온전히 남아있는 유일한 니케의 상이라고 한다(AD 4).
(세계 유일의 니케 여신 상)
니케여신 우측에는 멤미우스 기념비가 있다(BC1).
(멤미우스 기념비와 복원도)
멤미우스는 기원전 1세기 초 로마의 독재관이었던 술라(Sulla)의 손자이다.
기원전 1세기 로마가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자 에페소는 폰투스 왕국의 미트리다테스 왕과 연합,
로마에 저항하고 폭동을 일으켜 근처의 로마인들을 무차별 학살하였는데
당시 사망자가 약 8만이였다고 한다.
술라가 폭동을 진압하고 폰투스군을 몰아냈는데
이 비는 술라의 전승비인 동시에 학살당한 로마 시민들의 추모비이기도 하다.
삼거리에서 좌측 길(서쪽)로 가면 도미티아누스 우물/폴리오 기념비를 지나
도미티아누스 신전이 나온다(AD1).
(문만 남아 있는 도미티아누스 신전)
81년부터 96년까지 로마를 통치한 도미티아누스 황제를 봉헌한 신전이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철권을 휘두르며 기독교를 박해한 인물로 유명한데
부인의 묵인하에 암살당하고 "기록말살형"을 받은 황제이다.
영어로 폭군tyrant이란 말 어원이 황제에서 시작되게 만든 폭군의 원조이다.
(에페스로 공급되는 물을 관리하던 곳-폴리오 우물. AD1)
(바실리카 서쪽의 이면 도로)
다시 삼거리로 돌아나와 북쪽 길을 내려가면 헤라클레스의 문이 나온다.
이길을 쿠레테스 거리라 하는데
로마의 행정와 종교적 업무를 담당하던 사제를 쿠레티라고 불렀다 하는데
이 거리의 시작 부분에 종교 지도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서 그렇게 명명하였다.
( 쿠레테스 거리)
(돌아다본 멤미우스 기념비와 폴리오 우물)
거리의 양 측에는 상점들 앞에는 동상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시에서 에페소의 위인 동상을 동쪽 편에 세웠고
서쪽 편에는 재벌가가 자비로 자신의 동상을 세웠다고 한다.
지금은 동상이 거의 사라지고 좌대만이 남아 있는데
그중 목없는 동상이 하나 서있다.
시저를 제왕 절개하여 분만 시키고 말라리아를 고쳤다는
BC 1세기 의사 알렉산드리아의 것이라고 한다.
길복판에는 헤라클레스의 문이 있다(AD4).
기둥에 새겨진 사자의 가죽을 입고 있는 헤라클레스 부조가 있다하는데
증명 사진을 찍는 사람들 때문에, 또 아내의 증명 사진을 찍느라 자세히 보지 못했다.
계단이 있고 문이 좁아서 우마차가 통행을 하지 못했다고 하며
아까 보았던 니케의 부조는 이 문 위 아치의 일부로 추측된다고 한다.
셀수스 도서관까 쭉 뻣은 길을 조금 더 내려가면 트랴야누스 황제의 우물이나온다(AD2).
높이 12m의 2층 구조인데,
중앙의 단 위에 세워놓은 황제의 석상 발 끝에서 물이 흘러내렸다고 한다
(트라야누스 우물,복원도와 남아있는 유적)
트라야누스는 본토가 아닌 속주 출신의 첫 로마황제인데(이베리아 출신)
로마 제국의 영토를 최고로 넓힌 현제였다.
지금의 루마니아인 다키아 지방,이란 일대인 파르티아, 상 메소포타미아등을 정복하하고
나이가 들어 알렉산더처럼 세계 정복을 더 못함을 한탄하였다 하는데
우물의 중앙 단위의 트라야누스 석상은
한쪽 발로 지구를 상징하는 둥근 공을 밟고 있었다고 한다.
이미 당시에 지구가 공처럼 둥근 것을 알고 었을까?
.
(남아있는 황제 석상의 발과 둥근 공)
헤라글레스 문에서 셀수스 도서관까지 이어지는 쿠레테스 거리의 서쪽에는
산비탈에 계단식으로 늘어선 테라스 집들의 터가 있는데(BC1~AD7),
에페소는 지중해와 흑해를 잇는 상권이 형성된 곳으로 부자가 많았고,
그런 부자나 귀족이 살던 집이다.
바닥은 모자이크화, 벽은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었다고 한다.
(테라스 집 앞의 모자이크)
(거리 아래에는 모자이크 박물관이 따로 있다. 유료)
길 우측에는 하드리아누스 신전이 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 신전)
로마 방방곡곡 부지런히 돌아 다녔던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후임이다.
남아 있는 신전 앞면 아치에는 디케 여신상이,
뒷면의 벽에는 메두사의 상반신이 부조 되어 있다고 알려졌는데
뒷면 벽의 주인공은 메두사가 아니라 황제가 사랑했던 미소년 안토니우스라는 설이
최근오스트리아 빈 학회에 의해 제기되었다.
(앞 아치와 뒷면의 부조물이 있는데)
(아치엔 디케 여신상,)
(뒷면은 미소년 안토니우스이다.)
아닌게 아니라 안토니우스 머리카락을 자세히 보면
메두사의 뱀 머리칼과는 달라 보이기도 한다.
그럼 가슴은 갑빠인가요? 물어보니 가이드가 그럼요! 한다.
신전 한쪽 면에는 말을 타고 멧돼지를 쫒아가는 장군 모습이 있는데
에페소 건립 신화를 표현한 흥미있는 부조물이다.
전설에 의하면 아테네의 왕 코드루스의 아들인 안드로클루스는
새 도시를 어디에 세워야 할지 알기 위해 델피의 신전에 신탁을 구했는데
‘생선과 산돼지와 불이 함께 만나는 곳에 도시를 세우라’는 신탁을 받았다.
에페소 지역에 이르러 그가 부하들과 함께 생선을 구워 먹던 중에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불똥이 튀어 코레소서 산에 불이 나고 말았다.
바로 그 때에 그 숲속에서 산돼지가 달려 나왔는데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이곳이 '신이 원하는 장소'라고 여겼다고 한다.
(스콜라스티시아 목욕탕 입구)
신전 뒤에는 스콜라스티시아 목욕탕이 있는데
가이드가 깜빡 했는지 설명을 빼먹고 그냥 신전 아래 공중 변소로 가서
나중에 책을 보고 알았다.
(공중 변소)
공중 변소는 유로였는데
직사각형의 건물로 한번에 4~50명이 같이 사용할수 있었다한다.
물이 흐르는 수로 위에 앉아 용변을 보고 발앞에 흐르는 물로 손을 씻게 해놨는데
물의 상류엔 높은 신분의 사람이 앉고 신분 순서로 그다음부터 앉았다한다.
천장의 반은 개방하여 냄새를 제거하였고
건물 중앙엔 연못과 분수를 설치하여 용변보는 소리를 막았다한다.
화장실을 나와 다음 건물로 들어가면 쿠레테스 거리와 대리석 거리가 만나는 곳,
셀수스 도서관 건너편의 매춘의 집으로 이어진다(AD 4).
(매춘의 집)
집들은 3층 구조인데 1층은 손님 대기실, 2,3층이 침실이였다.
에페소는 이름에서 보듯 대지의 여신 아르테미스를 섬기는 도시여서
일반적으로 여성의 지위가 높았다한다.
따라서 창녀라하더라도 고객을 선택할 권리를 갖고 있었으며
로마의 여성들과는 달리 참정권도 있고 자신의 집도 소유할수 있었다고 한다.
매춘의 집에서 길(대리석길)을 건너면 셀수스 도서관이다.
(셀수스 도서관과 우측 마에우스와 미트리다테스의 문)
셀수스는 로마에서 파견된 이지역의 통치자로 114년 사망후 .
그의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 셀수스 도서관을 세우기 시작했고, 그의 손자대인 125년 경에 완공되었다.
260년에 있었던 화재로 파괴되었고 20세기 초 오스트리아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었다.
1970년대부터 현대적인 복구작업을 하여 1978년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이 도서관은 당시 12,000권의 서적을 소장하고 있었다는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페르가몬 도서관 다음으로 당시 세번째 도서관이었다.
양피지로 된 책들을 보관하기 위해 벽을 2중으로 만들어 습기에 대비하였다.
도서관 정면 벽에는 지혜, 덕성, 학문, 지식을 나타내는 네 여인의 석상이 있는데
진품은 비엔나의 쿠스티스토리쉬 박물관에 있고 여기엔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다.
정문으로 들어가면 도서관 내부이다.
(내부 상상도)
(안에서 대리석 거리를 내다 봄.)
(2중아치로 된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 문)
도서관 바로 옆에는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의 문이 나온다.
노예였던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가 자유의 몸이 되면서
아우구스투스황제에게 바친 아고라의 출입문인데
안에는 100m 넓이의 사각형 구조로 된 아고라가 있다(BC 1).
항구를 통해 들어온 많은 상품이 거래되던 곳이였다 .
(아고라 유적)
(대리석 거리)
대리석 거리는 도서관부터 반원형 극장까지 이어지는 도로이다.
하수시설이 설치되어 있고 길 가운데 매춘 광고물이 유명하다.
(매춘 광고판)
(사랑을 표시하는 하트와 에로스의 화살이 있고 구멍은 동전을 표시)
즉 사랑을 하려면 동전을 들고 이발보다 큰 성인만 오라는 뜻의
세계 최초 상업용 광고인데
여인의 가슴 부위 사각형은 어음이나 이름표가 아닐까 추측한다고..
대리석 도로 끝에는 반원형 극장이 있다.
(대극장)(누르면 확대됨)
이 극장은 터키 전역에 산재한 노천극장 중에 가장 규모가 큰데
관중 24,00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대형 야외극장으로
총 3단의 구조인데 각 단은 모두 22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피온산 경사면을 이용하여 건축하였는데
BC3세기 헬레니즘 시대의 것을 1세기 로마 시대에 대대적으로 증축하었다.
이곳에서 사도 바울이 아르테미스 여신을 모시던 사람들과 설전을 벌였다고도 한다.
(3단의 객석)
(바닥에 남아있는 대리석과 복원도)
대극장에서 항구까지 연결되는 길은 아르카디우스 황제(395~408)가 복구했다하여
아르카디아 도로라 한다.
길이가 500미터에 이르렀고, 마차가 달리는 중앙선은 폭이 11미터였다.
양 쪽으로 늘어선 5미터 폭의 주랑 바닥에는 모자이크가 장식되었으며
그뒤에 상점들이 들어서 있었다.
5세기에 세워진 네개의 고린트식 기둥위에는 기독교 복음사가 네명이 있었다한다.
(아르카디안 도로와 상상도,도로뒤 항구 옆에는)
(망루가 있었고 그넘어는 문둥병 환자 촌이였다고..)
(북문으로 향하며 돌아다본 대극장)
북문으로 가다 보면 좌측에 성모 마리아의 교회로 가는 길이 나온다.
원래는 2세기 항구 옆에 세워진 건물로
중요한 물건을 도시로 가져가지 않고 즉석서 매매하던 곳인데
4세기에 교회로 전환 되었다.
성모께서 요한 사도와 함께 에페소로 옮겨와 살던 곳이라는 전설이 전해 왔는데,
이 성당은 교회 사상 성모께 봉헌한 맨 첫 번째 성당이다.
이곳에서 431년 에페소 종교회의(Council of Ephesus)가 열렸고
마리아는 사람이면서 신인 예수의 어머니로 결정하여
예수의 신성을 부정한 네스토리우스파에게 파문을내렸다.
(마리아의 교회)
(북문으로 나가는 길)
북문을 나와 버스를 타고
아야술룩 언덕의 사도 요한 기념교회로 간다.
(성요한 기념교회 정문)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
당신의 제자 요한에게 당신의 어머니를 맡기셨고
예수 사망후 사도 요한은 42년 경 성모 마리아와 에페소로 오게 된다.
예루살렘 근처의 큰도시 대신 멀리 떨어진 에페소로 왔던 이유는...
에페소는 항구여서 종교에 대하여 비교적 관대하였고
여성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았던 곳이기도 하였기 때문이 아닐까?(가이드 설명)
마리아는 항구옆 마리아의 교회가 있던 곳에 거주하면서 나병 환자를 돌보았고
도미티아누스에 의해 밧모 섬에 유배되었다 돌아온 요한은
100년경 묵시록을 쓰고 이곳에서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예수의 제자 중 유일하게 천수를 누림)
요한의 무덤임을 알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 있던 곳에 4세기 경 목조 교회가 세워졌고
그 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527∼565년) 때 재 건축 되었다.
13세기 셀주쿠 터키의 침공후 방치 되었다가 1402년 몽골의 침공으로 파괴되었다.
성인으로 추정되는 유해는 13세기초 4차 십자군에 의해 바티칸으로 옮겨졌다.
(돌아다 본 정문)
(묘가 있던 곳에선 산위의)
(셀축성이 바로 보인다. 비잔틴시대의 성,현재는 건축도구 전시장.)
문을 나가면 언덕위 정원에
시멘트로 만든 지형 모형물이 있는데 그위에는
시기에 따라 퇴적물 때문에 멀어져간 해안선을 표시해 놨다.
언덕에서 내려다보니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였던
아르테미스 신전터가 보인다.
(기둥 하나만 남은 아르테미스 신전터)
BC 635년에 처음 신전이 생겼고
그후로 아홉번이나 파괴되고 재건축 되었는데
BC 564~540년에 세워진 건물은 200 x 425m 엔 높이가 20m에 달해
세계 7대의 불가사의중 하나였다 한다.
이름을 영원히 남기기 원했던 헤로스트라토란 사람에 의해 파괴되었고
BC 334~260년에 다시 세워졌다.
269년 코트족의 침입과 381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명령으로 파괴되어 완전히 버려진 후
기둥들은 다른 건물 건축 자재로 사용되고 하나만 남아 있다 한다.
에페소가 기독교의 중심 도시로 바뀌면서 대지의 여신에 대한 신앙은
마리아에 대한 신앙으로 바뀌었다.
(언덕에서 본 셀죽의 모습)(누르면 확대됨)
(이사베이사원.나중에 사원의 정원은 묘지로 사용됨)
짧지만 길었던 유적 탐방을 마치고 숙소를 정해 놓은 이즈미르로 향한다.
에게해 연안에 있는 이즈미르는 터키 삼대 도시중 하나이다.
콘야와 마찬가지로 숙박하러 들리는 도시이다,
(에게해)
(도시 진입 우측 산 꼭대기엔 승전기념비가 있다.)
(KAYA 이즈미르 호텔)
온천욕을 할수 있는 호텔인데
피곤하여 아무짓도 못하고 그냥 잠만 잤다.
터키여행 여섯째 날.